Bharat Devotion
Embroidered artwork for 앗사카 자타카: 비탄에 빠진 왕과 쇠똥구리의 전생: Embroidered Buddha seated in meditation on a pink lotus, with a golden dharma wheel and a white stupa in the mountains

앗사카 자타카

비탄에 빠진 왕과 쇠똥구리의 전생

사랑하는 우바리 왕비의 죽음으로 비탄에 잠겨 국사를 팽개친 앗사카 왕에게, 신통력을 지닌 고행자(보살)가 왕비가 쇠똥구리로 환생하여 똥더미의 짝을 더 사랑하고 있음을 눈앞에서 보여줌으로써 왕의 어리석은 애착을 단번에 깨뜨렸다.

전 아내를 그리는 승려의 그리움

부처님께서는 팔리 대장경의 자타카 제207번인 이 이야기를, 출가 생활에 들기 위해 떠나온 아내를 향한 끈질긴 그리움에 시달리는 한 승려에 관해 설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집착이 전생에서도 고통을 낳았다고 말씀하시며, 그 전생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 이야기는 이러한 그리움이 무상함에 대한 단 한 번의 흔들림 없는 통찰로 얼마나 온전히 해소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슬픔에 무너진 왕

앗사카 왕은 까시 왕국의 포탈리 성을 다스렸으며, 으뜸 왕비인 웁바리를 견줄 데 없는 우아함을 지닌 여인으로 여겨 왕으로서의 소임보다도 아끼었다. 왕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왕은 위로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겼다. 그는 왕비의 시신을 자신의 침상 아래 관에 안치하게 하고, 칠 일 동안 음식을 들지 않은 채 그곳에 누워 있었다. 가족과 대신들이 일어나 나라를 다시 다스리라고 간청했지만, 왕은 그 모든 청을 물리쳤다.

한 수행자의 연민

그 무렵 보살은 히말라야에 사는 출가 수행자였으며, 깊은 선정을 통해 얻은 높은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먼 곳의 일을 살펴볼 수 있는 천안도 있었다. 슬픔에 야위어 가는 앗사카 왕을 본 보살은, 이제 아무 목적도 이룰 수 없는 집착에서 왕을 풀어 주고자 포탈리로 가기로 결심했다. 포탈리의 한 젊은 바라문, 훗날 사리불이 될 그는 그 빛나는 수행자를 만나 도착 소식을 슬픔에 잠긴 왕에게 전했다. 왕은 곧바로 그에게 나아가, 자신이 받을 수 있는 어떤 위로라도 간절히 청했다.

다시 태어난 왕비

보살은 웁바리가 이미 죽음을 거쳐 자신의 업에 따라 새로운 생을 얻었다고 왕에게 분명히 말했다. 생전의 자만심이 공덕 있는 행위를 밀어냈기 때문에, 그녀는 바로 그 동산에서 암컷 쇠똥구리로 다시 태어나 있었다. 왕은 자신의 섬세하고 향기로운 왕비가 그토록 미천한 생명이 되었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보살은 신통력으로, 풀밭 위에서 똥 덩이를 굴리고 있던 그 쇠똥구리와 짝을 불러냈고, 그 곤충에게 사람의 말을 주어 스스로 대답하게 했다.

오래된 기쁨을 밀어낸 새로운 기쁨

왕비였던 과거의 삶에 대해 질문을 받고, 눈앞에 선 왕을 여전히 사랑하느냐는 물음을 받자, 쇠똥구리는 주저 없이 왕비로서의 과거 존재는 끝났다고 답했다. 오래된 기쁨과 고통은 새로운 기쁨과 고통에 가로막힌다고 그녀는 말했다. 곁에서 똥을 굴리는 수컷 쇠똥구리가 이제 앗사카 왕이 한 번이라도 되었던 것보다 천 배나 더 소중하다고 선언했으며, 지금의 짝을 잃느니 차라리 왕에게 해가 닥치는 것을 기꺼이 보겠다고 했다.

진실이 부순 슬픔

전 왕비 자신의 목소리로 이 말이 전해지자, 앗사카 왕의 슬픔은 즉시 녹아내렸다. 죽음과 재생조차 넘어설 수 있다는 사랑의 환상이, 가장 평이한 말로 그 앞에 드러났다. 그는 보존되어 있던 시신을 치우고 합당한 의식에 따라 화장하도록 명했으며, 때가 되자 새롭고 덕스러운 왕비를 맞이했다. 그리하여 칠 일 동안 그를 사로잡았던 슬픔의 마비 상태 대신, 맑게 깨어 있는 지혜로 다시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부처님의 신원 밝히심

가르침을 마무리하며 부처님께서는 두 생에 걸친 인물들을 밝히셨다. 현재 전 아내를 그리워하며 괴로워하는 승려는 그 전생에서 앗사카 왕이었다. 그가 놓지 못했던 여인은 왕비로서의 생과 쇠똥구리로서의 생 모두에서 웁바리였다. 승려를 왕에게 데려간 포탈리의 젊은 바라문은 사리불이었다. 그리고 부처님 자신은, 집착만으로는 결코 스스로 풀 수 없었을 슬픔에서 왕을 자비로 구한 그 수행자였다.

쇠똥구리를 택한 까닭, 더 부드러운 소식이 아닌 이유

불교 주석서는, 보살이 왕비의 사랑이 끝났다고만 말하고 그 재생의 특정하고 체면을 손상하는 형태는 명시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지적한다. 자타카가 쇠똥구리를 고집하는 까닭은 그 미천함이 가르침의 무게를 온전히 실어 나르기 때문이다. 더 부드러운 보고는 왕으로 하여금 자신의 집착을 대신한 더 고상한 집착을 상상하도록 내버려 두었을지 모르며, 그것은 교훈을 제거하지 않고 누그러뜨리는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대신 보살은, 한때 아름다웠던 왕비가 이제 똥 사이에서 만족하고, 쓰레기를 먹으며, 자신보다 선호한 곤충 짝에 묶여 있는 모습을 왕에게 직면시켰다. 그리하여 보살은 왕에게 물러설 품위 있는 이야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왕은 자신을 노예로 만든 것이 특정한 집착의 대상이 아니라 집착 그 자체임을 보도록 강요받았다.

현재로 이어지는 가르침

이야기 틀의 승려는, 앞서의 앗사카 왕처럼, 한때 영원해 보였던 감정을 자신의 주의를 지속적으로 요구할 권리가 있는 무엇으로 착각한다. 그는 자신이 그리워하는 사람이, 그가 더 이상 나누지 않는 세월과 선택으로 빚어져, 의미 있는 모든 면에서 이미 완전히 다른 누군가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자타카의 가르침은 왕의 공적이고 마비시키는 슬픔에 그렇듯, 평범한 승려의 조용하고 사적인 그리움에도 곧바로 적용된다. 한때 두 사람을 묶어 주던 기쁨이나 고통은 시간이 지나면서 양쪽 모두에서 새로운 기쁨과 고통에 가로막혀 대체된다. 이미 지나간 것에 매달리는 것은, 오직 알아차림만이 끝낼 수 있는 고통을 오래 끌 뿐이다.

알고 계셨나요?

앗사카 자타카(제207번)는 출가하기 전 아내를 그리워하는 비구의 이야기다.

앗사카 왕은 카시 국의 포탈리 도시를 통치했으며, 왕비 우바리의 죽음 이후 관을 침상 아래 두고 7일간 단식하며 애도했다.

신통력을 갖춘 고행자 보살은 우바리가 전생의 허영심과 공덕의 부족으로 암컷 쇠똥구리로 환생했음을 드러냈다.

인간의 언어로 말하게 된 쇠똥구리는 옛 쾌락과 고통이 새로운 쾌락과 고통에 의해 가려지며, 자신의 벌레 배우자를 앗사카 왕보다 천 배나 더 사랑한다고 선언했다.

부처님은 현재의 비구를 전생의 앗사카 왕으로, 그가 그리워하던 여인을 우바리로, 그리고 왕을 슬픔에서 해방시킨 고행자를 자신으로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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